미국에서의 첫 미팅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한국에서 나름 마케팅으로 잔뼈가 굵다고 생각한 터라 자신이 있었습니다. 미팅 전날, 프로젝트 배경부터 타깃 분석, 캠페인 방향까지 빠짐없이 정리한 자료를 메일로 공유했습니다. 한국에서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충분했습니다. 다음 날 미팅에서는 바로 실행 논의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미팅이 시작되자마자 돌아온 질문은 이랬습니다.
“우리가 어떤 과제를 받았는지 다시 한번 설명해 줄래요?”
“기본 정보, 제품이 뭐고 타깃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핵심이 뭐고, 난 뭘 해야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솔직히 화가 났습니다. ‘자료를 다 보내놨는데 왜 안 읽고 온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반복되자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 자체가 다른 거였습니다.
한국은 문서로 설득하고, 미국은 대화로 합의한다
한국의 업무 방식은 ‘보고’ 중심입니다. 문서의 완성도가 곧 업무의 완성도이고, 사전에 공유된 자료를 기반으로 빠르게 의사결정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미팅 전에 자료를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이 미덕이죠.
미국은 다릅니다. 미국의 업무 방식은 ‘미팅’ 중심입니다. 미팅에서 방향을 함께 정렬하고, 질문과 토론을 통해 이해를 공유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역할, 책임, 일정 같은 것들도 문서로 일방 전달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통해 상호 확인하고 확정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잘 만든 문서를 보내도 미국 파트너는 그걸 읽고 ‘숙지해 미팅에 오는’ 것이 아니라 ‘미팅에서 함께 얘기하면서 이해하려’ 합니다. 이걸 모르면 정성껏 준비한 자료가 왜 무시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괜히 속상한 마음만 갖게 됩니다.
속도의 한국, 프로세스의 미국
업무 속도에 대한 기대치도 완전히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한 사람이 다양한 영역을 폭넓게 커버하면서 일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역할을 따지기보다 ‘일이 빠르게 되게 하는 것’이 우선이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구조입니다.
미국은 역할별로 철저하게 분업화된 협업 구조입니다. 광고 기획자는 캠페인의 커뮤니케이션 리드 역할에만 집중합니다. 문서를 만들 때도 공유 문서에 각자의 파트를 작성한 뒤 각자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죠. 한국처럼 한 사람이 전체를 끌고 가는 구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국의 속도감으로 미국 파트너를 밀어붙이면 십중팔구 마찰이 생깁니다. ‘왜 이렇게 느려?’라고 느끼는 순간 상대방은 ‘왜 프로세스를 무시해?’라고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커뮤니케이션 도구부터 다르다
사소해 보이지만 실무에서 가장 많이 부딪히는 차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도구입니다.
한국에서는 급한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합니다. 어떤 수단보다 빠르고 직관적이니까요. 하지만 미국에서 업무 전화를 거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개인 전화번호를 주고받는 것부터가 흔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소통은 이메일로 하면서 모든 이해관계자가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기록 기반의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속도보다 우선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이메일로만 해결하려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앞서 말했듯 미국은 대화를 통해 합의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중요한 사안은 이메일로 배경을 공유한 뒤 반드시 콜을 잡아야 합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일할 수 있는 실무적인 팁을 하나 드리니 이 방법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국 시간으로 저녁에 이메일을 통해 핵심 내용을 보냅니다. 그러면서 한국 시간으로 다음 날 오전에 미팅을 요청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시차의 한계를 가장 효율적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의 결이 다르다
업무 방식만 다른 게 아닙니다. 마케팅 메시지를 만드는 방식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한국 광고에 익숙한 상태에서 미국 광고를 접하면 놀랄 만큼 단순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미국 광고에 익숙해진 뒤 한국 광고를 다시 보면 너무 빽빽해서 보기가 힘듭니다. 이건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가 광고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전 아티클에서도 언급했듯 한국 소비자는 광고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서사, 감정, 공감을 통해 브랜드와 관계를 쌓아갑니다. 반면, 미국 소비자는 광고에서 즉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서론 없이, 의미 부여 없이 전달하려는 혜택을 가장 간결하고 임팩트 있게 보여줘야 합니다.
이 차이를 모른 채 한국에서 잘 먹혔던 감성적 서사 중심의 광고를 그대로 미국에 가져가면 소비자는 기대 만큼 반응하지 않을 겁니다. ‘잘 먹혔던 괜찮은 광고인데 왜 반응이 없지?’라는 의문이 든다면 대부분 이 지점을 놓치고 있을 겁니다.
타깃을 보는 눈도 달라야 한다
마지막으로, 타깃 세분화의 방식도 한국과 결이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연령, 성별, 관심사 중심으로 타깃을 나눕니다. 미국에서는 여기에 더해 축을 더 고려해야 합니다. 바로 인종과 문화 그룹입니다. 시장의 문턱을 넘는 데 어떤 그룹에서 제품 수용성이 높을지에 대한 고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이 히스패닉 소비자를 고려해 타코 맛, 비리아 맛을 출시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단순히 제품 라인을 늘린 것이 아니라 특정 문화 그룹의 식문화에 맞춰 확장한 전략적 판단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하던 ‘20대 여성’ 같은 구분이 미국에서는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그 안에서 어떤 문화적 맥락을 가진 소비자인지까지 들어갈 수 있어야 진짜 타깃팅이 시작됩니다.
다른 시장에는 다른 문법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있습니다.
“That’s not how we do it here.”
한국에서 당연했던 것들이 미국에서는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문서를 완벽하게 만들어도 미팅에서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했고, 빠르게 밀어붙이려 하면 프로세스를 존중하라는 피드백이 돌아왔고, 성공 공식을 충실히 따라서 감성적으로 잘 만든 광고는 반응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차이는 어느 쪽이 맞고 틀리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시장에는 다른 문법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문법을 먼저 이해한 뒤에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 해외 진출을 준비하는 기업이 제품이나 가격보다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어쩌면 이 문법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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