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이야기를 비추는 리더, 30년 글로벌 방송 현장에서 만들어진 리더십

이에스더 멘토
30년 글로벌 미디어 현장에서 사람과 이야기를 연결해 온 리더.
아리랑TV 창립 초기 멤버로 시작해 30년간 글로벌 방송 현장을 지켜온 이에스더 멘토.

편성 PD에서 콘텐츠 제작, 글로벌 마케팅, 조직 리더십까지. 그녀의 커리어는 언제나 ‘사람’과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확장되어 왔습니다. 지금 그녀는 방송국 국장이자 대학 교수, 그리고 전문 코치로 활동하며 조직과 개인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발견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이에스더 멘토/리라랩


글로벌 방송인의 출발점

Q. 처음 방송국에 입사하셨을 때 어떤 일을 하셨나요?

아리랑TV 초창기,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어요. 편성 PD로 입사해 24시간 방송을 어떻게 채울지, 자체 제작을 할지, 외주 제작을 할지, 외화를 수입할지까지 모든 것을 백지에서 설계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시스템이 있지만, 그때는 방송국의 ‘뼈대’를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가던 시기였죠.

Q. 다양한 영역을 경험하셨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다면요?

‘I Love Korea’ 프로젝트가 떠오릅니다. 지금처럼 K-컬처가 알려지기 전, 한국의 지역과 문화를 해외에 소개하기 위해 지자체와 협업해 전국을 직접 다니며 콘텐츠를 제작했어요.
또 하나는 한국 문학을 해외에 소개했던 프로젝트입니다. 공지영 작가, 은희경 작가, 이성복 시인 등의 작품을 영어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형식으로 재해석해 소개했죠. 당시로서는 꽤 도전적인 시도였습니다.

Q. 글로벌 마케팅 업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 무엇인가요?

아리랑TV가 미주와 중남미 시장에 진출하던 시기였어요. 저는 PD 출신이었지만, 두 손 들고 마케팅에 도전했습니다. 스페인어 전공이었지만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언어였기에 다시 공부하며 준비했죠. 처음엔 기회를 쉽게 주지 않았어요. 뉴스레터 제작, 내부 커뮤니케이션 같은 역할부터 맡았습니다. 하지만 준비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중남미 시장 개척팀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파나마 케이블 TV 전시회에서 하루 종일 설명하고, 설득하고, 관계를 만들며 중남미 첫 계약을 성사시켰던 경험은 제 커리어의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Q. PD 시절 잊지 못할 사건도 있으신가요?

입사 1년 차 때, 잊을 수 없는 방송 사고를 한 번 크게 낸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 스포츠인 씨름을 영어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일 녹화 후 그날 저녁 바로 방송해야 하는 촉박한 일정이었죠. 사실 그 상황에서는 모든 준비와 셋업이 이미 완벽하게 끝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CG가 제때 준비되지 않았고, “11시까지 하기로 했으니까 되겠지”라는 안일한 판단을 했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끝까지 확인하고, 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초년병이었던 저는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고, 결국 프로그램은 불방되는 큰 방송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그날 이후 거의 사흘 동안을 시체처럼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떠올리면 이불킥을 하게 되는 순간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 30년을 이 길에서 버텨왔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놀랍습니다. 그 쓰라린 경험은 분명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든 계기였습니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기억은 해외 취재 현장에서의 경험입니다. 아시아·중동 지역의 사회와 문화를 다루는 교양 프로그램 취재로 레바논을 방문해, 현지에서 태권도 홍보대사로 활동하던 분을 인터뷰하던 날이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카메라를 끄는 순간,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고 그 지역의 유력한 야당 정치 지도자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곧바로 모든 통신이 차단되며 현장은 순식간에 긴장 상태로 바뀌었죠. 인터뷰를 끝낸 직후였기에 더더욱 아찔했던 순간으로, 지금도 그때의 긴장감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방송 현장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늘 예측할 수 없는 변수의 연속이죠.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이에스더 멘토/리라랩


리더로 성장하며 느낀 위기와 소통의 철학

Q. 리더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통 원칙은 무엇인가요?

세 가지입니다. 사람, 질문, 그리고 투명성. 성과 이전에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먼저입니다. 상대의 말 뒤에 숨겨진 감정과 욕구를 읽어야 진짜 소통이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또 저는 지시보다 질문을 선택합니다. “네 생각은 어때?”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방식이죠. 마지막으로 투명성.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왜 지금 중요한지 맥락을 충분히 공유하면 조직은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Q. 경청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지만, 실제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멘토님이 생각하시는 ‘경청을 잘하는 방법’이 있다면 한 가지 팁을 부탁드립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감정적인 존재라고 느꼈습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각자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수없이 봤거든요.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감정이 어긋나면 대화는 쉽게 왜곡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경청은 말 그대로의 의미보다 그 말 뒤에 숨은 의도와 감정을 읽으려는 태도입니다. 무엇을 말했는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말했는지를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 저 역시 오랫동안 ‘경청을 잘한다’고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코칭을 배우며 깨달았어요. 나는 듣고 있었던 게 아니라, 목표를 향해 상대를 이끌려 하고 있었다는 걸요. 지금은 결론을 서두르지 않고, 상대가 정말 이해받고 싶어 하는 지점을 먼저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경청은 기술이 아니라, 끊임없이 훈련해야 하는 태도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Q.코칭을 배운 지금, 다시 리더 역할을 맡는다면 예전과 다르게 행동할 부분이 있을까요?

너무 많죠.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후끈거릴 정도로 부끄럽기도 해요. 예전에는 팀원들과 대화할 때 이미 ‘정답’을 정해놓고 시작했던 것 같아요. “결국 이건 해야 해”, “목표로 가야 해”라는 전제를 깔아둔 채 말이죠. 저는 비교적 겁이 없는 편이라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팀원들이 느꼈을 두려움이나 불안은 충분히 살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지금이라면, 그 불안과 걱정을 먼저 인정하고 “두렵지만 그래서 더 기대해볼 수 있는 지점”을 함께 만지는 대화를 할 것 같아요. 그때는 그 ‘감정의 케어’를 놓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이에스더 멘토/리라랩


미디어 환경의 전환과 진화

Q. 유튜브와 넷플릭스 등장으로 방송 환경이 크게 변했는데요. 그 변화의 초입에서 느낀 충격이나 위기의식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굉장히 컸습니다.저는 오랫동안 글로벌 마케팅을 맡아 아리랑TV를 해외 플랫폼에 진출시키는 일을 해왔고, 당시 국제방송의 핵심 성과 지표는 ‘수신 가구 1억 가구’였습니다. BBC, NHK 월드, DW 모두 같은 기준을 쓰고 있었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예산과 인력을 투입했고, 성과도 분명히 냈습니다. 그런데 미디어 환경이 온라인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어느 순간 “이제 위성방송은 필요 없다”, “예산과 인력을 줄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제가 해온 일들이 조직에 부담을 줬다는 평가까지 받았을 때, 그동안 쏟아온 시간과 노력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어 굉장히 큰 충격이었습니다. 변화는 이해했지만, 감정적으로는 매우 아픈 순간이었죠.

Q. 그렇다면 빠르게 변화하는 콘텐츠 환경 속에서, 아리랑TV는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이제는 ‘한국을 홍보하는 정책 채널’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청자를 상대로 한 방송이 아니라, 이용자와 만나는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시점이에요. 아리랑TV는 30년 동안 쌓아온 글로벌 네트워크와 브랜드 신뢰, 영어 콘텐츠라는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강점을 살려 단독 플랫폼에 머무르기보다, K-컬처 IP를 연결하고 협업하는 글로벌 콘텐츠 허브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양한 창작자와 스타트업, 콘텐츠 파트너들과 함께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는 중심 플랫폼이 되는 것, 그게 앞으로의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이에스더 멘토/리라랩

사람의 이야기를 비추는 멘토링

Q. 앞으로 멘토링을 통해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멘토님의 방송 경험과 리더 커리어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30년 동안 방송 현장에서 콘텐츠와 마케팅, 조직을 경험해 왔지만 멘토링에서 제가 드리고 싶은 건 기술이나 노하우 그 자체는 아닙니다. 제가 가장 크게 깨달은 건, 사람은 어떤 분야에 있든, 어떤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든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에요.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이미 하나의 콘텐츠가 있고, 각자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가 가진 서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도록 옆에서 비춰주고 함께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충분한 경험과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끼곤 하죠. 그럴 때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자기만의 스토리로 단단하게 연결해 갈 수 있도록 작은 등불 같은 멘토가 되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지금의 후배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단단하게 붙드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의 성과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놓치지 않는 것. 커리어도, 환경도 계속 변하고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지는 순간들을 반드시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내가 선택한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 생각하고 성찰하며 계속 성장하려는 태도.
그것이 결국 긴 커리어를 버텨내는 가장 큰 힘이 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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